[차장 칼럼] R&D가 절대善은 아니다

입력 2023-11-02 17:50   수정 2023-11-03 00:23

정부 고위직을 지내고 모 법인 대표로 있는 지인이 최근 이런 말을 건넸다. “이 나라에서 사는 건 아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가려고 애쓰는 것 같다. 현재 자리를 지키는 것도 만만치 않다.” 한국 사회의 생존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는 비유였다.

경쟁이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은 분야도 드물게 있다. 그중 하나가 과학기술계다. 지난 6월 말 나눠 먹기 연구개발(R&D)을 재검토하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주문이 나오기 전까진 그랬다.

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정부 R&D 예산을 약 3조4000억원 줄인다는 방침을 8월 내놓은 후 연일 북새통이다. 윤석열 정부가 미래를 저버렸다는 등 비판이 넘쳐난다. 주로 야당 주변과 과학기술계에서 날 선 지적이 나온다.
R&D 옥석 가려야 할 시점
정부 R&D 예산은 2000년대 이전엔 4조원이 안 됐다. 20조원에 달한 게 4년 전이다. 최근 정부 R&D 예산 증가 속도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. 3년 새 무려 10조원 늘었다. 2020년 24조2558억원, 2021년 27조5072억원, 2022년 29조7770억원으로 매년 3조원 이상 뛰었다. 올해는 31조778억원에 달했다.

일각에선 2020년 전후 R&D 예산 폭증이 선거용 포퓰리즘이었다고 분석한다. 우연인지 몰라도 R&D 증가율이 역대 최대를 기록한 202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범여권은 183석을 가져가며 압승했다.

기실 무작정 늘린 예산이 많다. 올해 미래국방혁신기술개발 사업은 수류탄 투척 로봇, 무인잠수정 저피탐 기술 등 고난도 과제를 내세웠다. 산학연이 머리를 맞대도 개발하기 어려운 기술이지만 과제당 한 명에게 4억여 원을 준다고 해놨다. 내년 이 사업 예산은 올해의 3분의 1로 줄었다. 삭감된 R&D 사업을 보면 이런 경우가 부지기수다. 이른바 주인이 정해진 나눠 먹기 R&D다.

묻지마 복지류의 R&D도 많다. 올해 1000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받은 디지털 격차 해소 기반 조성 사업이 대표적이다. 이런 사업들이 80~90% 삭감의 칼을 맞았다. 정부 R&D는 권리만 있고 책임이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. 약 97%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.
의대 이슈와 함께 다룬 건 잘못
이제 어떤 R&D가 ‘좋은 R&D’인지 따져야 할 때다. R&D는 한국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성장판이다. 응용·개발연구에선 연 80조원에 달하는 기업 R&D가 시금석 중 하나다. 특허 등 지식재산권(IP)을 창출하도록 인도하는 IP-R&D도 좋은 대안이다.

그간 정부의 실책은 이만저만이 아니다. R&D 비효율 문제가 윤 대통령과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, 과학계 원로 간 오찬에서 제기된 게 지난해 11월이다. 예산 조정을 차분하게 할 시간이 있었단 얘기다. 대통령의 불호령 이후 불과 한 달여 만에 삭감안을 급조해 내놓으니 각계 비판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. 국회예산정책처마저 절차상 하자를 거론하고 있다.

의대 정원 파격 확대 방침을 R&D 삭감과 동시에 들고나온 것도 악수로 보인다. 이공계 최상위권 인재가 몰리는 의대가 늘어나면 좋은 R&D를 담당할 인력을 상당 부분 흡수할 여지가 크다. 인재를 과학계 밖으로 떠밀고 지원금마저 줄인다면 누가 R&D를 하겠다고 선뜻 나서겠는가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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